《먹고 마시고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갖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 명품 브랜드들이 라이프스타일 영역을 적극 확장하는 이유다.》
불황에도 꿈쩍 않는 모습을 보여온 명품 시장이 내부적으로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일단 주 고객층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드컴퍼니는 올해 명품 시장을 전망하는 보고서에서 명품 소비 참여 연령이 내려가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구매 비중을 살펴보면 지난 2019년 밀레니얼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가 36%,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가 8%였는데 2022년에는 밀레니얼세대 47%, Z세대가 18%로 늘어났다. 2030년에는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 알파세대(현재 13세 미만)가 세계 명품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가장 큰 구매층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는 사람이 달라졌으니 파는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 루이비통,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부터 A.P.C. 같은 컨템퍼러리 브랜드까지 젊은 고객층이 선호하는 체험형 복합공간을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증가한 체험형 마케팅 공간은 레스토랑과 카페다.
미래 잠재고객 만드는 ‘스몰 럭셔리’
전 세계에서 20개 이상의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아르마니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F&B 매장에 대해 “쇼핑을 마친 고객이 꼭 들르는 곳”이자 “아르마니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완벽한 장소”라 정의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패션의 영역은 단순히 입고 걸치는 옷, 액세서리, 가방 등에서 더 나아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요즘 세대는 누구보다 먹는 데 진심이다.
이탈리아 보석 브랜드 불가리는 일찌감치 라이프스타일 확장의 중요성을 깨닫고 2004년부터 호텔 및 리조트와 F&B 분야에 진출했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팝업 카페를 열기도 했는데, 올 4월에는 일본 긴자 근처에 전 세계에서 8번째 호텔을 오픈했다. ‘불가리 호텔 도쿄’에서도 ‘일 리스토란테’의 니코 로미토 셰프, ‘스시 호세키’의 겐지 교텐 셰프 등 미쉐린 3스타에 빛나는 셰프들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지갑이 가벼운 젊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고가의 상품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F&B 매장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소비를 하고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테이블웨어를 비롯해 공간 곳곳을 채운 오브제, 화장실에 비치된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자사 럭셔리 상품으로 꽉 채워놓기 때문이다. 또 브랜드마다 F&B 매장이 부티크 건물의 한 층 또는 한편에 자리하거나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해 식사 전후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부티크를 둘러볼 수 있게 만들었다. 아이쇼핑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아예 식사 예약 시간 전 직원이 매장 투어를 시켜주는 곳도 있다. 물론 의도가 다분한 서비스다. ‘라이프 트렌드 2023’의 저자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누구나 카페와 레스토랑은 좀 더 쉽게 진입하는데 여기서 소비자의 취향을 이끌어내 새로운 욕망을 부여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실제로 명품 브랜드의 의도는 적중했다. 디올의 역사가 시작된 프랑스 파리 몽테뉴가 30번지에 가면 2년간의 재단장을 마치고 지난해 봄 오픈한 ‘30 몽테인’이 있다.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레스토랑과 카페에서 프렌치식 미식을 즐기러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부티크에서 쇼핑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대부분 간 김에 둘러본다. 미국 패션 브랜드 랄프로렌이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 등에서 운영하는 ‘랄프스 커피’의 경우 더 친근하게 소비자를 파고든다. 음료와 베이커리류를 1만 원 내외로 판매 중인데, 식음료보다 비싸지만 예쁜 굿즈가 지갑을 열게 만든다. 마니아를 지닌 스타벅스처럼 랄프스 커피도 팬이 많다.
다만 문턱을 낮춘다고 해서 브랜드 고유의 품격마저 사라진다면 실패한 전략이다. 커피 한 잔에 2만 원, 한 끼 식사하는 데 코스 종류에 따라 10만 원대에서 30만 원대까지 기꺼이 지불하는 이유는 그 브랜드여서다. 프랑스 파리 생로랑 리브두아 매장 옆에는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작은 생로랑 카페가 있다. 4월 기준 아메리카노 4유로(약 5800원), 라테 5.5유로(약 7900원)로 테이크아웃 전문점치고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일회용 컵마저도 시크한 생로랑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다.
구찌와 루이비통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다를까. ‘스몰 럭셔리’를 즐기러 오는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브랜드마다 메뉴부터 담은 그릇, 내오는 사람, 앉아 있는 공간까지 고객과의 모든 접점에 신경 쓰고 있다. 이것저것 갖추다 보면 당장은 고가 상품을 파는 것보다 이익을 덜 볼 순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고민의 결과는 달다. 지금도 “가격은 저렴하지 않지만 서비스와 분위기를 생각하면 가볼 만하다”며 다녀간 고객들의 인증 사진과 후기가 각 브랜드 SNS에 쏟아지고 있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자발적인 ‘내돈내산’ SNS 게시물들을 통해 홍보 효과는 물론 트렌디한 이미지까지 챙길 수 있는 셈이다.
먹고 마시는 데 진심인 MZ
지난해 1인당 명품 소비액은 세계 최고를 기록한 우리나라에도 럭셔리 브랜드 F&B 매장이 잇달아 들어서고 있다. 루이비통은 5월부터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에서 팝업 레스토랑 ‘이코이 앳 루이비통’을 연다. 영국 런던의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이코이’는 세계 각지의 문화적 레퍼런스가 깃든 독창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4월 17일부터 레스토랑 예약 플랫폼인 캐치테이블에서 선착순으로 예약을 받았다. 제레미 찬 총괄 셰프가 선보이는 런치 및 디너 코스와 티타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찌는 이탈리아 3스타 셰프 마시모 보투라와 협업해 이탈리아, 미국, 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지난해 3월 서울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번 봄 시즌에는 전형규 총괄 셰프가 제주도에서 영감을 얻은 ‘센티에로 디 마운트 한라’를 선보였다. 비장탄에 구운 토종 제주 흑돼지 등심에 참나물 페스토, 유채꽃, 마늘종, 푼타렐라를 곁들여 제공된다. 신메뉴가 포함된 5가지 코스 요리는 13만 원, 7가지 코스 요리는 18만 원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면 디올이 제격이다. 핫 플레이스인 팝업스토어 ‘디올 성수’는 성수동 특유의 힙한 분위기가 묻어나고, 청담동 ‘하우스 오브 디올’은 우아하다.
프랑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메종키츠네의 ‘카페 키츠네’도 선택지가 다양하다. 입구의 대나무숲으로 유명한 가로수길 플래그십스토어는 지금이 딱 야외 테라스에 앉기 좋은 계절이다. 현대백화점 판교점·목동점, 부산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은 쇼핑하다 쉬어가기 좋다. 시그니처 메뉴는 국내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카페 블랑’으로, 라테에 캐러멜 향이 나는 크림을 얹었다.
스위스 고급 시계 브랜드들의 특별한 공간도 있다.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5층에 위치한 IWC의 ‘빅 파일럿 바’는 IWC가 전 세계 최초로 운영하는 공식 카페다. IWC를 대표하는 ‘빅 파일럿 워치’에서 영감을 얻은 빅 테이블(10m)과 빅 스크린(6m)이 압권이다. 브라이틀링이 지난해 2월 서울 한남동에 오픈한 ‘브라이틀링 타운하우스 한남’은 한 건물에서 브라이틀링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다. 1층은 부티크와 카페 겸 바이고, 2층은 브라이틀링이 직접 운영하는 전 세계 첫 레스토랑 ‘브라이틀링 키친’이다.
전시장과 카페가 만난 포르쉐의 팝업스토어 ‘포르쉐 나우 성수’는 반응이 좋아 올 8월까지 연장됐다. 전시 차량 수는 적지만 차가 계속 바뀐다. 매시간 도슨트 설명도 들을 수 있다. 2층 카페에서는 유명 맛집 ‘도식화’의 마들렌과 음료, 포르쉐 굿즈를 판매하며 계약 상담도 가능하다.